이 글은 나의 체험을 기록한 것이며, 하나의 믿음이나 이론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창조주가 아니며, 그저 경험한 것을 담담히 전할 뿐입니다.
독자는 각자의 방식으로 읽고, 필요한 만큼 받아들이면 됩니다.
글은 아직 진행 중이며, 모든 것은 시간이 흐르며 자연스럽게 드러날 것입니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이른 꿈은
한국 나이로 3~4살 무렵, 어쩌면 서양 기준으로 생후 몇 개월이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나와 세 살 차이인 여동생이 태어나기 전후의 기억이 선명하게 남아 있으니,
이 시기의 의식이 단순한 유아기의 흐릿한 감각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나는 새벽마다 눈을 떴다.
아직 밤이 물러가지 않은, 그러나 이른 아침의 기운이 밀려오는 그 사이—
그 시간엔 늘 부모의 다리 사이에 누워 혼자 깨어 있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낯선 존재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그 존재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눈빛은 무섭고, 분위기는 어두웠고, 나를 부르고 찾는 기운이 강했다.
그러나 나는 그 당시 '귀신'이라는 개념조차 몰랐기에
그저 막연한 두려움으로 받아들였을 뿐이다.
그들은 단발적인 방문자가 아니었다.
나는 이후 성장하면서도 꿈속과 현실 속에서 계속해서
그 존재들이 나를 ‘찾고 있다’는 기운을 감지했다.
그들과의 관계는 일방적인 호출이었고, 나는 피하거나 무시하는 방식으로 버텼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나는 동시에 ‘빛의 존재’와도 자주 조우했다.
그러나 그 존재들 역시 단순히 밝은 존재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유난히 밝은 대낮, 햇빛이 강한 시간에 출현했고,
모든 감각이 열리는 시간대에 더 강하게 나를 둘러쌌다.
그들은 말로 대화하지 않았다.
그러나 분명한 언어 아닌 언어로 나에게 신호를 보내왔다.
눈빛이 아닌 시선, 표정이 아닌 에너지, 음성이 아닌 의도—
나는 이른 시기부터 세상에는 인간의 말 외에
‘제3의 언어’가 존재함을 직관적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나는 조용한 아이였다.
친구들과 어울려 뛰어노는 일보다, 혼자 방에 앉아
인형놀이, 책, 그림 같은 ‘조용한 상호작용’을 선호했다.
그런 나에게, 어느 순간부터 ‘공간’이 말을 걸기 시작했다.
형태는 없었다.
하지만 내 방 전체, 혹은 그 안의 특정 지점이
나를 응시하고, 웃고 있으며, 반응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의식의 촉감으로 느낄 수 있었다.
처음엔 그것이 너무 낯설어 정신이 이상해질까봐 스스로를 다그쳤다.
방을 바꾸고, 고개를 흔들고, 정신을 붙잡으며 저항해 보았지만
그들은 늘 먼저 거기 있었다.
밖을 나가도 마찬가지였다.
학교 등굣길, 심부름길, 골목 모퉁이…
‘공간 속의 공간’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은 언제나 따라붙었다.
그 정체를 묻는 듯한 속삭임을 작게 던지면,
그들은 웃음의 결을 조금 더 확장하며 응답했다.
사물들도 그 흐름에 합류했다.
특히 ‘태양’은 강력했다.
그것은 늘 일정한 메세지를 반복했다.
“얼른 와.”
그 말은 속삭임이 아니라, 쏟아붓는 느낌이었다.
때로는 따뜻했지만, 때로는 절박하고 압도적이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 태양은 끝까지 나를 기다릴 존재일지도 몰라.”
그러나 곧 다시 현실로 스스로를 끌어내렸다.
“정신을 붙잡아. 다 잊어. 미친 건 아니야.”
나는 그렇게 균형을 유지하려 애썼다.
밤이 되면 어둠이 찾아왔다.
가위에 눌리고, 반복되는 추락과 납치, 길 잃음의 꿈들.
그 꿈들은 끝이 없고, 고단하고, 깊었다.
그러다 다시 잠들면, 이번엔 화이트홀이었다.
(화이트홀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이어가려 한다.)
그렇게 나는 하룻밤에 10개의 꿈을 꾸며,
현실과 꿈, 낮과 밤, 존재와 환영 사이를 오가며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