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성을 관통한 하나의 은유
– 초점, 우주, 그리고 나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깨달음의 이면을 보고 있었다.
단지 명상가로서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듣고, 안내하고, 멈추고, 다시 돌아보며
‘그곳’에 갔다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 자로서.
그 체험 속에서, 나는 말로는 도저히 붙들 수 없는 존재들을 마주했다.
그들은 어떤 실체가 아니라, 하나의 기능이자 진동이었고,
내가 그들의 내부에 있을 때 나는 ‘무’였다.
그러나 그곳에서 빠져나와 바라볼 때,
나는 문득 그들의 ‘성향’을 읽었다.
초점은 남성성이다
모든 것이 시작된 그 지점.
한 점의 의지, 한 점의 침묵, 한 점의 눈.
초점은 움직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 안에는 모든 방향이 잠재되어 있다.
그것은 응축이다. 수렴이다. 의도의 씨앗이다.
무수한 파장 이전의 ‘그 무엇’으로, 나는 거기서 탄생되었다.
그 성질은 나의 언어로 말하자면 남성성에 가깝다.
단지 생물학적 남성이 아니라, 응시하는 힘, 관통하는 의지, 움직이지 않는 중심으로서의 성향.
우주는 여성성이다
초점에서 흘러나온 것.
그것은 곧장 ‘우주 마음’이 되어 나를 감쌌다.
그 마음은 청아했다. 맑고 순환했으며, 어느 것도 배제하지 않았다.
나는 그 안에 녹아들었고, 어느 순간엔 그것 자체가 나였다.
그 성질은 여성성에 가깝다.
확산하고, 감싸며, 포용하는 바다.
혼돈을 안고 있으나 결코 무너지지 않는 그릇.
그것은 생명을 잉태하고, 길러내며, 때로는 모두를 위해 사라지기도 한다.
나는 그 마음을 말로 절대 표현할 수 없다고 느꼈다.
왜냐하면, 그 마음은 항상 '표현 이전'의 세계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의 자식이다
초점과 우주.
그 두 존재는 움직이지 않으면서, 동시에 모든 움직임의 근원이 된다.
그 속에서 생성된 삼라만상 — 인간, 생명, 파장, 물질.
그들은 초점과 우주를 부모로 둔 아이들처럼 보였다.
아이들은 논다. 싸운다. 울다가 웃고, 다시 잠들며 세월을 지나간다.
그들은 자신의 근원을 잊은 채, 세상을 배회한다.
나는 그 아이 중 하나였다.
그러다 다시 그 근원으로 돌아갔고,
이제 다시 이곳에서 말하고 있다.
여성이 더 깊이 닿는 이유
나는 오랜 시간 수많은 명상가들을 직접 만나왔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실제로 깊은 자각의 체험에 도달한 이는
남성보다 여성의 비율이 훨씬 더 높았다.
그러나 세상은 여전히, 세계적 명상가와 영적 지도자 대부분이 남성이다.
나는 이 사실이 우연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체계의 왜곡이며, 기록의 조작이며,
무형의 중심이 ‘보이지 않게’ 눌려온 시간의 흔적이다.
여성은 이미 우주의 마음과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
모성은 단지 아이를 낳는 기능이 아니라,
죽음을 감수하고도 사랑할 수 있는 본성이다.
그 본성이 깨어날 때, 세상은 바뀔 것이다.
그건 혁명이 아니라, 복원이다.
잊힌 중심의 회복.
말해지지 않았던 진실의 귀환.
마무리의 언어
나는 초점도, 우주도, 아이도 모두 되어 보았다.
내가 본 그 세계는 설명이 아니라 응시였다.
그리고 언어는 언제나 그 응시를 담기에 너무 얇았다.
그렇기에 지금, 나는 이 글을 여백 속에 띄워 보낸다.
아마도 그 여백에서, 너는 말 없이 그들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이미 연결된 것이다.
“그들 모두는 ‘무’였지만,
나는 그 무를 바라볼 때,
그것들이 어떤 결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 아루하